Profile ImageKIM WAN

홍경한(미술평론가)

 

“내 작업의 출발은 칼질로 만든 종이들의 상처 난 단면들로 시작된다. 상처를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그 상처를 만지고 쓰다듬고 아름답게 혹은 깊이 있게 승화시켜가는 과정이다. 그러한 상처로 만들어진 바탕 면은 이미 그 자체로 내가 인생을 바라보는 미술적 언어이다.” 작가 김완

 

‘인생을 바라보는 미술적 언어’라는 대목에서 김완 작가의 예술관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가 왜 무수한 칼질을 하며 정화적인 색깔로 드러내는지 그 배경에 대한 이해도 가능하다. 나아가 흔히들 그의 작품에 대해 ‘치유의 예술’로 정의하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어쩌면 하찮을 수 있는 골판지가 곧 자신의 투영이요, 칼질은 곧 담금질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김완 작가 작업의 일부일 뿐 전체를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간혹 그의 그림에 대해 종교적이니 하는 문장들이 등장하는데, 지나치게 신격화하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비평적 거슬림이 있고, 명확한 분류 없이 ‘숭고의 미’ 운운하는 것 또한 작가의 작품 분석에 유의미한 지점을 제공하지 못한다. 객관적 비평에선 금기시하는 이런 표현들은 작가에 대한 호의적 차원임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작품의 실체를 가리고 막연한 신화화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절제되어야할 측면이 있다.

 

1. 필자는 김완의 작업에 대해 형식과 기법을 하나로 묶고, 나머지 하나를 내용으로 대입한다. 이 두 가지는 상호교류한 채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알고리즘으로 부족함이 없는 탓이다. 우선 형식과 기법을 포괄해 말하자면, 그의 작업은 사실상 ‘어둠’을 뜻하는 테네브라(tenebra)에 가깝다. 우리가 흔히 ‘테네브리즘’이라 일컫는 용어의 어원으로, 이것은 ‘빛을 읽는 방식’이자 공간연출방식으로서의 회화를 가리킨다.

17세기 카라바조 작품의 영향을 받은 화파인 ‘테네브로시(tenebrosi)’를 지정하는 용어이기도 한 ‘테네브라’는 카라치파의 정신을 잇는 귀도레니를 비롯해 바로크시대를 대표하는 벨라스케스, 피터 폴 루벤스 등이 있다. 이들의 작품은 하나같이 격렬한 명암대조에 의한 극적인 표현이 특색이다. 그야말로 새로운 회화세계를 개척한 혁명적인 방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데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미술사적 내러티브가 아니다. 작가 김완의 작업에서 전달되는 ‘빛을 조율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그의 여러 작품들은 ‘빛의 조율성’을 특징으로 한다. 2008년 <light scape>나 2012년 <light scape> 등도 그렇지만 지난 10여 년간 이어온 그의 작품들의 다수는 배경과 물질의 경계 없는 조화, 빛과 어둠을 기반으로 한 음영의 차분한 리듬이 도드라진다. 이런 유형의 작업은 한국화를 하던 200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부터 이미 골판지는 그에게 남다른 시도를 위한 중요한 예술매체였고, 오브제의 활용, 선을 자르거나 긋거나 붙이는 방법성은 미적 가치를 열람케 하는 유의미한 도전이었다. 다만 아크릴로 제작한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2005) 시리즈에서 알 수 있듯 초기만 해도 ‘빛’ 대신 시공간을 함축한 양상의 작업들을 선보여 지금과는 일정한 차이를 둔다. ‘빛’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된 건 2009년 즈음에 이르러서다. 2006년 ‘우주 찾기’에서 <GATE>(2006) 등의 작품으로 시간과 공간, 물성과 행위성을 융합적으로 실험했고, 2007년 <Water fall>연작에 이르러선 이전보다 보다 단순화, 정리되는 수순을 밟는다. 그러던 중 2009년 ‘빛을 만지다’라는 제목의 전시(관훈갤러리)를 통해 오늘의 작업과 맞닿은 <light scape> 연작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2010년부턴 ‘빛과 색’을 ‘만지다’라는 동사로 치환해 화면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이후부턴 현재의 작업과 가장 유사한 지점에서 그의 예술은 이어진다. 2012년 <light scape>에 이은 2013년의 <Zen scape>, 2015년 ‘상처를 만지다’로 약간의 굴곡과 함께 주제와 구성 면에서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깊은 어둠 속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가는 물질, 상하좌우 대칭 아래 정돈된 질서, 빛과 선의 강약에 따른 극명한 화면효과, 행위가 접목된 색의 진폭에 의한 감정의 유동 등은 하나의 맥락을 이룬다. 재미있는 건 10여년의 화사에서 중요한 요소들만 발췌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빛, 색, 상처, 시간, 공간 등이다. 선(禪 :zen)과 선(線)이라는 두 갈래의 각기 다른 선도 그 중 하나다. 이 명사들은 2005년 이후 근작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다. 어떤 것은 조형요소로, 어떤 것은 작가의 의도를 함의한 단어로 귀착된 채 작가의 ‘인생을 바라보는 미술적 언어’를 대신하고 있다.

 

2. 이 가운데 ‘빛’과 ‘색’은 김완 작업의 조형성을 개간한다. 타블로의 일정한 규칙 아래 빛이 침투해 색을 낳고 그 색이 균형을 유지하며 에너지를 산발한다. 골판지라는 재료에 색상, 명도, 채도가 덧대어지며 구현되는 입체감, 반복되는 규범적인 선들은 시지각적 한계성을 배제할뿐더러, 감각을 담보하는 일종의 환영까지 잉태한다. 빛의 영향으로 생성되는 이러한 흐름은 근본적으로 색과 형(추상화되는 형)에 대한 지각을 만들며, 빛에 의해 생겨나고 빛이 없으면 색도 명암도 존재할 수 없는 미적원리를 부각시킨다. 구성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일례로 <you & i-black & white>(2012)와 <you & i–love>(2012)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규율의 미학은 시각적 가능성을 충만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망막에 대한 항거를 유보시킨 우리네 실존에 대한 복선마저 제시한다. 특히 세 개의 정사각형이 함께 늘어선 <touch the color>(2010)의 전시 장면은 엄격한 건축미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경향은 <light scape-sea>(2012) 등에 이어 <touch the line, color & light>(2015), <touch the memory>(2016) 등의 작품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이 작품들은 회화적 알고리즘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동시대 언어의 일부로 상정해 놓고 있다는 외적인 의미도 있지만 빛과 어둠의 균등을 통한 사물의 구현을 넘어 빛을 이용해 빛의 특성을 강조하고 빛에 의해 빚어진 색의 조율을 따지고 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물론 김완 작업의 원류가 빛으로부터 시작한 시각예술임을 증거 하는데도 아쉬움이 없다. 선(線)은 그가 삶과 시각언어의 매개로 사용해온 회화 방법론이 사실상 거스를 수 없는 원초적인 내부의 표상, 실존의 기호를 담는 그릇 혹은 거푸집임을 증거 하는 요소이다. 이는 작가 자신의 존재성에 관한 질료와 갈음되는 것으로, 그 존재성은 만학의 길을 고집해온 예술가로써의 삶, 그 여정에서의 발화를 기초로 한다. 수없이 잇고 자르는 선은 내적으로 인고를 동반한다. 골판지 자체가 자신을 대리하는 재료라 해도 무리는 없다.(모르긴 해도 아마 그는 이처럼 나약한 소재를 통한 지루한 행위를 현실의 단락과 파편화된 고통들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여기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 끝자락에 자신의 본질에 대한 자문이 걸쳐 있다는 점이며, 성찰의 자세가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선들은 단순한 오브제나 사물의 일부가 아니라, 또한 상상의 결과가 아닌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한 현실 자각적 분동(分銅)이자 미의식의 궁극인 감동을 향한 길고 긴 삶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빛과 색, 선과 구성을 종합하면 그의 회화는 화면에 가득한 어떤 질감과 그 의미에 대한 물리적 결과는 유(有)와 호흡하는 공(空)의 관계를 산출시킨다. 여기서 공(空)은 결국 나를 비롯한 모든 것에 대한 비움의 드러남이자 채움의 여백(餘白: 비움의 ‘무한함’과 비워짐으로 인한 ‘충만함’)이라 해도 무리는 없다. 어딘가 모르게 경건함을 도출시키는 이 채움의 여백은, 공은 빛이고 빛은 시각에 잡히지 않으나 존재함(有)을 의미하며, 그 존재성은 색과 형으로 대체되는 것과 같다.

 

3.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의 그림은 상처를 보듬는 자발적 행위이기도 하며, 한줌의 빛과 어두운 색은 작가의 궁극적 지향성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자기 상처에 대한 연민과 고뇌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라거나 “현재 삶을 지탱하기 위한 몸부림에 대한 표현”, “(그의) 처절한 이야기는 작품 안에 숭고의 미로 집약되고 있다.”는 등의 여러 주석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시각에 따라선 빛과 어둠은 얼마든지 인생여정으로 대체될 수 있다. 작가조차 “칼질이라는 상처가 모아져 아름다운 면을 만들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예술이 지닌 자가 치유의 과정”이라고 말하니 말이다.

허나 (결코 포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김완에게 있어 그림은 삶의 목적이자 방식자체라는 데 보다 무게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는 삶이라는 여로의 단락이자 운율(韻律)이며 삶의 고저에 의한 정신의 분출과 맞닿는다. 내면과의 호흡이요, 내계와 외계-표상과 실제-내외 혼연일체와 근접하다. 세계에 반응하는 순간에 있어서의 실재적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깊이 분석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 표현 세계를 현대적 감각으로 확립해 나가는 것(궁극적으론 공명화 하는 것)도 의미한다. 표현의 현대적 감각화와 운율을 가동시키는 뿌리는 실존에 대한 탐구이다. 상(像)의 기초가 되는 기하학적 형태만으로도 납득할 수 있듯, 나로부터 시작된 존재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즉, 그의 그림은 나에 대한 의미적 접근 아래 시작되고 파생된다는 것) 이때의 실존이란 세계 내 일부로서의 현존재(Dasein), 자각하는 본연의 인간을 말한다. 물론 이는 서구철학에서의 견해를 넘어 화문의 본질을 추구하는 방법인 관물(觀物)과 관아(觀我)로 요약 가능한 동양철학에서의 설명도 덧붙일 수 있다. 즉, 세상 만물을 살펴 이치를 찾는 관물과 명백하게 나를 보며 인간의 존재 의의를 알아내어 증명하고 반성하는 관아의 관점에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그래서 파악도 어려우나)은연 중 그의 작품에 투영된 개념이다. 관물과 관아를 말할 때 최근의 작품들에서 더욱 돋보이는 건 관아다. 앞서도 말했듯 관아란 자신을 되돌아보고 살피는 성찰의 의미가 크다. 관물을 통해 존재의 순연과 이치를 헤아리고 그 속에서 진리를 얻고 도리를 알고자 하는 뜻이 숨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 대한 이해는 결국 관물과 관아의 세계를 들여다볼 때 비로소 명료한 설득력을 지닌다. 한편 필자는 예술을 통해 존재형식에 대한 내적 문제를 언급하며, 예술 활동으로 존재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김완의 행보에서 고집스러움을 본다. 말수가 그리 많지 않은 성격에서 알 수 있듯 예술가로서의 태도 또한 획일성에 안주하지 않는 모습을 읽는다. 그래서인지 자기 발전적인 보루로 실존을 말하고 진중한 자세로 항상 세계 내 존재임을 밝히고 있는 작가의 작업은 시각적 결과 이상의 흥미를 유발한다. 다만 이 흥미로움이 향후 시각적 향유에 머물거나 취향공동체에 의해 변주된다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Prev 1 ··· 25 26 27 28 29 30 31 Next